ESG 3 : 1950년대~1970년대 기업의 책임 논의

온라인팀 승인 2023.05.23 18:35 의견 0

18세기 이후 산업혁명이 가속화되면서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노동자들은 주택, 의료, 교육 등에서 심각한 상태를 겪었고, 점차 기업인들은 건강하고 숙련된 양질의 노동력이 생산성 향성 및 수익증대에 긴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처럼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따른 기업인들의 인식변화와 종교적 기반의 자선단체의 발달에서 CSR에 관한 맹아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대기업의 자선적, 공익적 재단의 설립이 자본주의사회의 주요한 미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벌과 도도의 논쟁

제1차세계대전, 대공황, 제2차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미국 기업인들의 사회적 인식에 큰 변화가 이뤄진 것도 CSR의 태동에 영향을 미쳤고, 벌(Adolph Berle)의 주주중심주의와 도드(Merrick Dodd)의 이해관계론이 제기되면서 기업의 책임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1946년 포춘지(Fortune)의 기업인 조사에서 응답자의 93%가 기업이 손익계산 외에 국가발전이나 사회복지에도 역할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기업의 책임에 관한 초기 논의는 광범위한 경제적 이익을 위한 공공신탁관리자(public trusteeship)로서의 책임, 주주․고객․직원․지역사회의 경쟁적 요구에 대한 균형자로서의 책임, 사회적 가치에 대한 자선의 책임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러한 책임들은 기업 자체보다는 주로 기업인(Businessmen)의 책임으로 이해되었고, 특히 자선의 책임에 관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역사적 논의를 활성화하는 단초가 되었다.

카네기는 ‘The Gospel of Wealth(1889)’에서 신탁윤리(trusteeship)를 제기했다. 그는 카네기는 부를 신에게서 신탁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고, 그러한 부는 사회에 배분하고 환원하는 것이 수탁자의 의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는 기업인들을 중심으로 초보적 단계의 CSR이 추진되었으나, 1929년 대공황을 계기로 CSR에 대한 본격적 논의가 시작됐다.

당시 벌리(Adolf Berle)는 “경영자는 기업의 주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고 주장했고, 도드(Merrick Dodd)는 “경영자는 보다 넓은 범위의 책임을 진다”고 반박했다. 소유와 통제(경영)의 분리가 역으로 주주의 이익을 침해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는 기업은 주주의 것이므로 경영자는 법과 회사정관에 규정된 권한을 주주를 위해 행사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경영자는 주주의 수탁자(대리인)로서 주주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드는 기업이 사회에 기여하기 때문에 법의 보호를 받는다고 보고, 경영자가 주주 이외의 자에 대해서도 공적 의무 혹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드는 대기업이 법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경영자는 주주에 대한 경제적 책임 외에도 사회적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의과정에서 주주중심주의(shareholder primacy)를 강조했던 벌리는 점차 도드의 관점을 지지하게 되면서 논쟁을 마무리지었다.

1930년대 벌리와 도드의 제1차 CSR 논쟁은 1970년대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의 도발적 기고문을 계기로 제2차 CSR 논쟁으로 이어졌다. 프리드먼은 주주에 의해 고용된 경영진에게 사회적 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수탁자(경영자)에게 위탁자(소유주)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했고, 이에 대한 활발한 반론이 전개됐다. 이러한 논쟁 과정에서 CSR 이론가들의 뇌리에 각인된 여러 문제의식들은 장차 지속가능경영과 ESG의 개념형성에 기여하게 된다.

CSR의 정의에 대해서는 광범한 이견이 존재하면서도 상호수렴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CSR의 개념에 대한 역사적 논의에는 시장행위에 의해 창출된 외부효과에 반응해야 할 의무, 타당한 사회규범과 법에 일치하는 측정 가능한 사회적 목표에 대한 재량적 지출, 전지구적 지배구조의 발전과 정상적 작동에 대한 책임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자양분들이 축적돼 있다.

1950년대 : ‘CSR의 아버지’ 보웬(Howard R. Bowen)

1950년대 CSR 논의에서는 기업인이 이해관계자들의 관점과 이익을 중재하고 조정하는 책임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에 따라 기업의 사회적 관리(Corporate Social Stewardship)에 대한 논의가 제기됐다. 1951년 스탠다드 오일(Standard Oil of Jersey) 이사회 의장 아브람스(Frank Abrams)가 경영자로서는 드물게 CSR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는 CSR을 경영자가 주주, 고객, 직원, 광범한 이해집단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관점은 점차 투자자 이론의 기본적 원리로 인식되었고, 오늘날 ESG의 기본적 토대가 되었다.

1950년대 미국은 주주이익을 저해하는 기업활동은 법적으로 제한을 받을 정도로 주주중심주의 법제도가 지배했다. 1953년 재봉틀 제작사인 A.P Smith가 프린스턴대에 1,500달러를 기부하자 주주의 이익을 침해한다는 소송이 제기될 정도였다.

이러한 여건에서 보웬을 비롯한 초기 연구자들은 기업의 책임에 대해 공격적 태세가 불가피했다. 또한 프린스턴대 기부사건에 대한 소송에서 법원은 해당 기부행위가 회사의 직접적 이익과 무관하더라도 기업의 책임에 부합한다고 판결함으로써 CSR을 원천적으로 제약하는 법적 관행에 제동을 거는 계기가 됐고, 이는 미국 기업들의 사회적 공헌을 활성화시키는 방향으로 회사법 개정 등 연쇄적 변화를 초래했다.

이후 샤인(Edgar H. Schein)을 비롯한 조직이론가들은 창업자와 경영자들이 기업문화에 특정가치들을 각인시킴으로써 직장문화에 중대한 영향을 준다고 보았다.

즉 직원들은 경영자가 관심을 갖고 평가 및 통제하려는 것, 혹은 중대한 사건이나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 계획적인 역할 모형, 지도 및 조언, 보상과 지위에 관한 기준, 직원의 충원·승진·은퇴·해고 등에 관한 인사방침에 대해 공식절차보다 경영자의 (비공식적이고 직접적인) 행동을 보고 학습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회사의 공식적 행동강령은 투명성을 강조하더라도 경영자가 불투명한 거래와 부정한 방법에 의존하는 직원을 중용하거나 편애하면 직원들은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가치가 자신의 회사에서 사실상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CSR이 경영자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아브람스의 촉구는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타당한 통찰로 간주되었다.

1950년대는 이처럼 공공신탁자 및 사회적 관리자로서 경영자의 책임이 강조되었고, 주요한 활동으로 기업의 자선활동이 거론되었다. 또한 이러한 활동은 기업인의 사회의식이나 기업의 평판에 미칠 영향에 대한 고려에 의해 촉진되는 것으로 이해됐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을 위한 주요한 수단은 자선활동과 홍보(Public Relations)로 국한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CSR의 아버지’로 불리는 보웬(Howard R. Bowen)은 <Social Responsibilities of the Businessmen>(1953)에서 기업인이 아니라 회사(법인)가 자선 등을 통해서 사회적 기여를 하는 것을 중대한 과제로 보았고, 기업의 이러한 역할을 허용하는 것이야말로 공공신탁관리자로서 기업인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1955년 12월 몽고메리 버스의 좌석문제로 흑인 기혼여성 로자 파크스(Rosa L. M. Parks)가 체포 및 기소되면서 발생한 버스 보이콧은 1년 넘게 지속돼 버스회사가 파산지경이었다. 로자 부부는 직장을 잃고 고향을 떠나야 했지만, 이 사건은 소비자 불매운동을 넘어 흑인인권운동의 역사적 이정표가 됐고,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소비자 불매운동으로 평가되었다. 미국과 유럽의 소비자운동의 발단은 사소하게 시작되었지만, 기업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넘어 법과 제도를 변화시키는 정치적 성과를 거두었다.

1960년대 : 카슨의 ‘침묵의 봄’과 탈리노마이드(thalidomide) 사건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기업의 사회적 반응성(responsiveness)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뤄졌다. 미국의 시민운동과 프랑스의 6.8혁명은 생태와 환경에 대한 시민운동으로 이어져 기업에 대한 사회적 압력을 본격화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여론이 고조되었던 미국에서는 네이팜을 생산하는 다우케미컬에 대한 소비자운동의 일환으로 식품포장용 랩(Saran Wrap)에 대한 불매운동으로 다우케미컬의 네이팜 생산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생물학자 카슨(Rachel L. Carson)의 ‘침묵의 봄(1962)’은 환경운동 대중화의 조명탄이 되었고, 1969년 산타바바라 해양오염사고는 ‘지구의 날’ 제정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경제계에서는 기업이 정당한 사회적 요구에 반응하고 적절하게 대응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 시기의 논의는 주로 기업이 이해관계자와의 상호작용과 공공정책 준수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기업의 이러한 활동은 이해관계자의 압력과 정부의 규제에 의해 촉진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활동을 위한 주요한 수단은 이해관계자와의 협상 및 규제에 대한 준수를 들 수 있다. 데이비스는 기업의 경제적 또는 기술적 이익을 넘어서는 기업가의 결정과 행동을 CSR이라고 정의했다.

[탈리노마이드 사건과 FDA의 프랜시스 켈시]

의약품 역사상 가장 비극적 사례로 꼽히는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 사건’은 독일 그뤼넨탈 제약사가 1953년 출시한 콘테르간(Contergan)이라는 입덧약으로 인해 유럽 8천여명 등 세계적으로 1만여명에 달하는 기형아가 태어난 사건을 말한다. 의사의 처방이 없이도 살 수 있었고 한 알만 복용해도 부작용이 나타났기 때문에 피해의 규모가 컸다. 아이들은 공통적으로 바다표범처럼 양팔이 아주 짧은 선천성 장애(해표상지증)를 갖고 태어나 부모들을 놀라게 했다. 제약사는 탈리도마이드 성분이 여러 차례 동물실험에서 무해한 것으로 입증됐다고 주장했으나, 재실험이 이뤄지자 동물에서도 기형아 출산이 확인됐다.

당시 미국의 피해는 17명에 그쳤는데, 1960년 8월에 FDA 의약검열관으로 임명된 캐나다출신 약리학박사 프랜시스 켈시(Frances K. O. Kelsey)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켈시는 신임 검열관으로서 탈리도마이드가 포함된 케바돈(Kevadon)의 안정성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의학적 원칙을 고수하고, 유럽 의 비극에 둔감했던 리처드슨-머렐(Richardson-Merrell) 제약사의 집요한 로비와 압력을 뿌리쳤다.

1건의 승인보류가 잠재적으로 수천명에서 수만명에 달하는 아이들과 부모들의 비극을 예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켈시는 FDA의 가치와 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로 기록되었다.

프랜시스 켈시에 관한 <워싱턴포스트> 보도

50여년 후에 발생한 한국의 가습기살균제사건에서는 기업은 물론이고 공공기관에서도 켈시와 같은 감시자가 존재하지 않았고, 잠재적 피해사망자가 1만여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탈리도마이드 사건’은 기업의 책임과 공공기관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에서 CSR의 역사에서 소비자 불매운동(boycott)과 함께 외부통제의 중요성을 상징한다. 즉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의 자발적 의지에만 의존할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되는 사회적 과제라는 것이다.

1970년대 : 캐롤의 CSR 4단계 모형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의 기고문으로 CSR 논쟁이 촉발됐다. 그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이익증가로 규정함으로써 이후 광범한 반향과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시기에는 자코비·세시·캐롤이 주도한 ‘사회적 책임이론’이 CSR 논의를 주도했다.

캐롤은 CSR의 4단계 모형을 제시했다. 1단계는 가장 기본적인 책임으로 양질의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판매해서 이윤을 창출하는 경제적 책임이고, 2단계는 공정한 규칙 속에서 법을 준수하는 법적 책임이다. 3단계는 기업 도 사회의 일원이므로 소비자와 종업원, 지역주민, 정부 등 모든 이해관계자의 기대와 기준, 가치에 부합해야 하는 윤리적 책임이다. 4단계는 경영활동과 관계없이 기부나 사회공헌을 통해 사회로부터 얻은 이익을 나누는 자선적 책임이다.

4단계의 구분은 우선순위나 시계열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 책임이 가장 기본적인 토대를 이룬다는 점과 자선적 책임이 가장 희망적인 지향점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4단계 모형은 이후 CSR의 세 가지 구성-사회적 책임성, 대응성의 방식, 기업의 사회적 성과-에도 반영되었다.

이후 포터는 4단계의 ‘경영활동과 관계없이 기부나 사회공헌’을 기업의 점증하는 환경리스크를 간과한 비현실적 접근으로 보고, 오히려 기업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라도 ‘경영과 관계가 깊거나 경영의 잠재적 리스크가 될만한 영역’에 전략적인 기부 및 사회공헌 활동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UN인간환경회의의 ‘스톡홀롬선언(1972)’에서 향후 지구환경에 대한 기업의 책임이 논의될 것임을 예고했고, OECD의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1976년)’에서 글로벌 대기업들이 제3세계에서 지켜야 할 지침을 제시함으로써 글로벌 CSR에 대한 토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또한 캐롤의 CSR 피라미드(1979)를 통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보다 구체적으로 특정되었다.

1970년대에는 기업 및 경영의 윤리에 관한 논의가 이뤄지면서 윤리적(ethical) 기업문화를 강조했다. 기업의 주요한 활동은 모든 이해관계자에 대한 존중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규범적 논의가 활성화되었고,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인권 등 사회적 가치에 대한 각성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또한 윤리강령과 같은 구체적 선언과 행동지침을 수립하라는 사회적 압력이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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